[인터뷰] 재즈 피아니스트 최윤미

 

지난 2011년 유네스코는 인류가 남긴 문화유산 중 ‘재즈 음악’에 대한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이를 알리기 위해 매년 4월 30일을 ‘세계 재즈의 날’로 지정했다. 우리나라에는 이 소식이 조금은 늦게 들리긴 했지만 2010년대 중반서부터 전국의 재즈 클럽 혹은 재즈와 관련된 문화공간들이 4월 30일을 재즈의 날로 표시하고 다양한 공연이나 프로그램들을 개최해 오고 있다. 인천에도 중구 신포동의 ‘버텀 라인’이라는 재즈 클럽이 30년 넘게 한 자리에서 운영되고 있고, 이후 연수구와 부평구, 남동구 등지에도 비슷한 콘셉트의 재즈 관련 공간들이 운영되었거나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인천 재즈협회, 인천 재즈 올 스타스와 같은 재즈 관련 단체들도 인천에서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인천에도 그런 단체와 공간들이 있다는 것은 인천에도 재즈 뮤지션들이 활동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실제 많은 시민들이 모르는 내용이었겠지만 보컬리스트 최용민과 피아니스트 송석철, 색소폰 연주자 남진우 등 ‘인천 재즈 한정 1세대’ 연주자들이 지금까지 활동을 해 오고 있고, 김형준(기타), 고호정(색소폰), 김호철(베이스) 등 현재 40대 이상의 중견 뮤지션들이 그 뒤를 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이후로 이를 이어주는 인천의 재즈 뮤지션들은 사실 그 수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고, 그런 이유로 지금 소개하는 인천 토박이 재즈 피아니스트 최윤미는 지역의 소중한 재즈 뮤지션인 동시에 현재 가장 활발한 국제적 활동을 벌이고 있는 자랑스러운 예술가이기도 하다. 최근까지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뒤 조만간 새 앨범 [7 Days]의 발매를 예정하고 있는 그를, 세계 재즈의 날을 앞두고 [인천신문]이 만나 봤다. 

 

인천신문(이하 ‘인’) : 미국 뉴욕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지 몇 달 안 된 걸로 안다. 어떤 활동을 이어나갔나?
최윤미(이하 ‘최’) : 지난해 8월에 왔으니까 그렇게 막 최근은 아니다. 한국에 와서는 음악기획 회사를 하나 설립했고, 이 회사와 그랜드 하얏트 호텔과 협업이 결정돼 현재 그 작업(주로 연주)이 진행되고 있다. 신규로 팀 하나를 준비하고 있기도 하다. 공적으로는 ‘인천시민문화협의회’ 위원직을 맡고 있는데, 그건 인천 시민들께 좀 더 많은 다양한 문화와 즐거운 음악생활을 즐길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자부심을 갖고 활동 중이다. 

인 : 뉴욕과 미대륙 등을 누비면서 활동했던 걸로 아는데, 귀국한 이유가 있나?
최 : 사실 미국에서 활동이 괜찮았다. 재즈 피아니스트라는 본령 외에도, 유명 뮤지션 콘차 부이카(Concha Buika)의 ‘B By B Inc.’를 비롯해 ‘The Girl Behind the Certain’ 프로덕션 에이전시의 뮤지컬 파트 등에서 음악감독이기도 했고, 뉴욕 벨칸토 오페라단의 재즈 디렉터 활동도 있었다. 그런데 미국도 지금 코로나19로 난리다. 내가 하고 있던 모든 활동들이 현지에서도 모두 중단됐고, 다시 시작하기까지 2년 혹은 그 이상도 걸릴 수 있다는 얘기가 있었기에, 일단 국내로 들어와서 이후 계획을 기다려보자고 했던 거다. 그렇게 한국에 와서는 ‘㈜뉴욕 아트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대표자로 활동하고 있다.

인 : 인천에서 재즈를 접하고 성장한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닌데, 언제부터 음악을 배운 건가?
최 : 피아노 자체는 세 살때부터 시작했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 정말 하기 싫었는데 어머님이 계속 밀어붙이셨다. 한일초교-부평서여중에서 학교생활을 하다 중학교 때 음악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진학한 학교가 인천예고였다. 여느 예고 학생들처럼 진학을 고민했고, 그때 어머니 권유로 숙명여대에 진학해서 클래식 피아노를 전공하게 됐다. 그런데, 사실 그때도 음악에 흥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연습도 잘 안 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교수님들이 나더러 휴학한 줄 알았다고 하셨으니까. (웃음) 어찌어찌 졸업은 했는데, 그러고 나니 정말 ‘찬바람’이 불더라. 기회도 없었고, 할 일도 없어 자존감이 심히 무너지기도 했다. 그러다 ‘서울재즈 아카데미’라는 곳을 알게 됐다. 
 
인 : 그럼 재즈를 비로소 알게 된 게 대학 이후였다는 건가?
최 : 그렇다. 클래식은 연주할 때 하나라도 틀리면 안 되지 않나. 그런데 재즈는 그렇지 않고 똑같은 음악을 연주해도 다르게 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었다. 그런데, 사실 서울재즈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건 재즈에서 쓰는 코드는 그냥 다 외워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절대 자유로운 음악이 아니었던 거다. 기본을 익히기가 너무 힘들었던 나머지, 배우다가 지쳐서 6개월 동안 쉬기도 했다. 그때 내 이름으로 포토샵 프로그램 교재까지 냈었으니까 정말 외도가 심했던 거다. (웃음)

그러다 다시 아카데미로 들어가서 공부를 하는데 그때부터는 ‘개념 정리’가 되면서 재밌어졌다. 그때 재즈를 제대로 하려면 서울예대나 동아방송대 등으로 진학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어서 동아방송대에 다시 입학했는데, 당시 신입생들은 다 스무 살인데 나 혼자 스물여섯인 거다. 그때 좀 혼란이 왔다.

인 : 그렇게 혼란이 온 후 내린 결론은 뭐였나?
최 : 동아방송대 한 학기를 마치자마자 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학교 교수(재즈 드러머 오종대)와도 상의하다가 국내에서 열렸던 ‘섬머셋 재즈 캠프’가 네덜란드와 연결돼 있어서, 그때 기회가 와서 네덜란드의 프린스 클라우스 콘서바토리로 진학했다. 그게 2010년 경이었다. 그런데, 유럽으로 나가보니 정말 잘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중 색소폰을 부는 러시아 친구와 좀 친해질 기회가 있었는데 그친구가 나와 팀을 하자고 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주에 보니 나보다 연주실력이 더 좋은 피아니스트와 합주를 하더라. 좀 충격을 받았다. ‘준비를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에 그때부터는 정말 눈에 불을 켜고 연습만 했다. 잠자는 시간 빼면 아마 연습만 했을 거다. 그땐 한국 친구들하고도 일부러 안 어울렸다. 그런데도 나는 좀처럼 무대 기회가 잘 없더라. 그래서 연주를 나름대로 녹음해서 유럽의 유수 페스티벌 측에 모두 메일을 보냈다. 그게 한 2백 통이 넘을 건데, 딱 두 곳이 피드백을 보내왔고 독일의 ‘Isdstein’이라는 이름의 재즈 페스티벌에서 겨우 서브무대를 서게 됐다.
 
인 : 한 번 무대에 서면 그래도 좀 실타래가 풀리지 않나?
최 : 맞다. 그렇게 연주한 커리어가 적힌 프로필을 갖고 다시 2백 통의 메일을 써냈는데, 이번엔 네 군데서 섭외가 왔고 그 연주들을 다 하니까 학교에서도 알아주기 시작했다. 2014년 5월 졸업연도를 보내던 당시 Leiden 재즈 콩쿠르에서 1등까지 했고, 그러니까 공연이 1주일에 10개씩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고서 한국에 온 다음 한국 유수의 음악 축제에 무대 지원서를 내니까 전부 피드백이 왔고, 그렇게 서게 된 무대들이 북촌 음악 페스티벌을 비롯한 서울의 유수의 축제는 물론 춘천 아트 페스티벌, 울산 재즈 페스티벌 등에서 연주할 수 있었다.

인 : 그러고 다시 뉴욕으로 갔는데?
최 : 음악을 잘 했던 친한 지인들이 그리로 건너간다고 해서 간 것도 있고, 사실 뮤지션으로서는 더 넓은 세상이 궁금했고 더 좋은 음악을 해보고 싶었다. 뉴욕 음악 신을 경험한 느낌은, ‘여긴 정말 세상에서 날고 기는 사람들이 와서 겨루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맞는 말은 아닐 수 있는데, 세계에서 재즈 제일 잘 하는 사람들은 죄다 뉴욕에 모인 듯한 기분?

그리고 뉴욕 물가가 장난이 아니다. 돈이 없는 상황을 맞이하면 그 자체로 뉴욕은 쉽지 않은 곳이 된다. 그래도 운 좋게 기회가 와서 ‘The Girl Behind the Certain’ 프로덕션의 오프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 재즈 피아니스트 겸 음악감독으로 활동을 하게 됐다. 처음부터 기회가 나한테 왔던 건 아니었다. 한국인이고 영어도 그땐 좀 더듬거렸으니까. 그랬다가 내게 음악감독 제의가 왔고, 그렇게 활동을 하게 되면서 뮤지션들을 콘트롤할 수 있으니까 영향력도 좀 생기더라. 그렇게 4~5년을 하면서 기타 활동들을 병행한 거다. 물론 그러다 최근 코로나19 때문에 중단이 되긴 했지만.

 

최윤미가 조만간 세계시장을 통해 발매할 새 앨범 [7 Days]의 앞뒤 커버 이미지.

 

인 : 지금까지 발표한 앨범이나 음원 등은?
최 : 2014년엔가 그때 실황앨범을 하나 낸 게 있는데, 지금은 내가 스스로 음원 사이트에서 내렸다. 그 내렸던 작품을 수정하고 보정해서 다시 낸 게 곧 발매될 [7 Days]다. 네덜란드 유학 시절 이탈리아 여행을 했었는데, 그때 로마에 있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작품이 있었던 거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걸 실제로 보니까 그게 큰 감동으로 다가오더라. 실제로 내 종교가 기독교이기도 하고 그래서, 이 주제를 음악으로 다뤄보자 했던 거다. 그리고,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약속했던 게, 첫 음반은 무조건 신에 대한 감사의 의미를 담자는 거였다. 2014년에 낸 걸 스스로 철회하고 다시 만들어 세상에 내기까지 그렇게 7년여가 걸렸다. 소중한 작품일 수밖에.

인 : 한국에 와서 한 대표적인 연주 활동이 있다면?
최 : 한국에 와서 만든 ‘블리스’라는 팀이 있다. 1930년대 앤드류스 시스터즈 같은 스타일을 모티브로 한 초기 스윙 재즈 스타일인데 한국에서 같은 시기에 ‘경성음악’으로 불리던 그 스타일이다. 예전 김시스터즈 느낌도 있다고 할 수 있는 거고, 그 팀으로 중구문화회관 등에서 공연을 했다. 그리고 기타리스트 피트 정의 밴드 코틴 그룹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아트센터 인천’에서 야외 공연도 했다.

인 : 4월 30일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 재즈의 날’이다. 당신에겐 어떻게 다가오나?
최 : 재즈가 이번 재즈의 날을 통해 좀 더 대중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음악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도 그걸 위해서 힘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제 그러고 있다. 사실 인천의 재즈 뮤지션으로서 느끼는 자부심이 꽤 있다. 신포동 버텀라인 주인장 언니(현 주인인 허정선씨는 1994년부터 운영)처럼 그렇게 한 곳을 오래 지키는 건 대단한 거다.   

인 : 코로나19로 음악계가 전반적으로 어려운 상황이고 당신도 그것을 느낄 거라고 보는데?
최 : 크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연주자가 공연을 할 수 없다는 건 크게 허탈한 부분이 있다. 지금도 새 팀을 꾸렸고 또 구상하는 다른 형식의 팀도 있는데, 정말 준비만 열심히 하고 있는 상태다. 오히려 연습 자체는 괜찮다. 일이 없으니까 모이라면 재깍 다 모인다. (웃음) 용인이나 고양 등의 문화재단 공모사업에 선정도 되는 등 성과도 있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선정 이후로도 연락이 안 오고 있을 정도니까 심각한 거다. 그래서 연습을 많이 하고 있고, 그나마 비대면 식의 공연들이 약간 있어서 그런 활동은 하고 있다.

인 : 향후 계획 중인 활동들이 있다면?
최 : 우선 5월에 ‘블리스’로 울산 태화강 재즈 페스티벌 일정이 있고, ‘초이스 왈츠’ 라는 새 팀을 통해 예술의전당에서 같은 달 공연이 예정돼 있다. 그리고 재차 블리스로 6월 남이섬 청춘 페스티벌과 예술의전당 공연이 있고, 아직 날짜는 미정이지만 인천 서구문화재단의 문화의 날 관련 공연이 계획돼 있다. 9월에는 초이스 왈츠 팀으로 트라이 보울 공연에도 대기하고 있다.

인 : 음악을 좋아하는 인천시민들에게 한 마디 하자면?
최 : 뮤지션이라서 이런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공연을 직접 관람하는 건 지친 삶의 활력이 될 수 있는 좋은 문화활동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코로나19로 경로가 많이 막혀 있는데, 비대면 공연으로라도 문화예술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매력과 그 문화예술이 주는 감동을 시민들께서 같이 공유해 봤으면 좋겠다.

 

2018년 인천 신포동의 재즈 클럽 ‘버텀 라인’에서 연주하던 당시의 최윤미. ⓒ배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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