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식 조립라인 갖춘 국내 최초 자동차 조립사업의 출발1962년 4월 군사정부가 발표한 자동차공업 5개년 계획에 따라 역사상 최초로 부평에 현대식 승용차 제조공장인 '새나라자동차공업(주)'가 설립되었다. 이는 재일교포 박노정 씨가 일본 닛산과 7개년기술협조계약을 통한 것이었다.1962년 8월 27일 새나라 자동차 공장 제1단계 준공식에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도 참석하였다. 당시 박정희 의장은 이날 축사에서 “우수한 자동차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 외화를 절약하게 된 것이 기쁘다”고 밝혔다.새나라 자동차는 그해
경인고속도로는 인천과 서울을 잇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다. 인천과 서울 간 급증하는 인적·물적 수송 수요에 대비해 건설한 것으로, 1967년 3월 24일에 착공, 1968년 12월 21일 양평동에서 가좌 나들목 구간이 우선 개통되었다. 1967년 5월 27일 인천공설운동장에서는 경인고속도로 기공식이 열렸다.경인고속도로는 기존 1시간에 달하는 운행 시간을 18분으로 단축시켰고, 서울과 인천을 하나의 생활권으로 연결한 것은 물론,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구축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가 1970년 7월 7
우리나라 최초의 판유리 공장은 인천에 설립됐다. 6·25 전쟁으로 대부분의 기간산업 시설이 파괴되고, 우리나라는 유리 한 장도 만들 수 없는 어려운 처지가 됐다.운크라(UNKRA: 유엔한국재건기구)의 도움으로 1956년 동구 만석동 석탄공사 저탄장 자리에 인천판유리공장 건설을 시작했다.2월 14일 오후 2시에 열린 기공식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장관들을 대동하고 ‘대통령전용열차’를 타고 참석했다. 이 공장은 당시 충주비료 공장, 문경시멘트 공장과 함께 3대 기간산업의 중요한 공장이었다.운크라에서 214만 달러, 우리 돈으로 6억환을 지
인천 강화 출신의 송암(松庵) 박두성(朴斗星)이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한글 점자를 창안한 것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해 반포한 지 약 500여 년이 흐른 1926년 11월 4일이었다.이 점자를 ‘맹인(盲人)을 가르치는 바른소리’라는 뜻의 ‘훈맹정음(訓盲正音)’이라고 했다.박두성은 시각장애인에게 ‘제2의 세종대왕’이라 칭송받고 있다.그가 창안한 한글 점자 훈맹정음은 시각장애인에게 세상의 한 면을 열어준 매개체였다.박두성은 1888년 4월 26일 강화에서 박기만의 6남 3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는 1906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의 정식 이민은 인천 제물포에서 1902년 12월 22일 121명이 하와이를 향해 출발한 데서 비롯된다. 이후 1905년 이민이 금지될 때까지 총 64회 7천400여명의 이민이 계속됐다.하와이에서는 19세기 초 사탕수수농업이 크게 발달해 경제에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자체 노동력의 부족으로 거의 외국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하와이 노동이민은 중국인(1852)과 일본인(1868)에 이어 20세기 초 한인 이민이 시작됐던 것이다.하와이 이민의 주선은 주한미국공사 알렌(H.N.Allen)이, 실제적인 업무
1893년 고종은 해군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조선수사해방학당(朝鮮水師海防學堂)’을 강화도에 설치했다. 이에 앞서, 영국 총영사에게 해군 교관 파견을 요청하고(1892.12), 해군학교 설치령도 반포했다(1893.3). 그리고 경기와 인천 연안의 방비를 총괄하는 군영의 명칭을 해연총제영(海沿總制營)으로 바꾸었다.조선수사해방학당은 총제영에서 설치했다 해 ‘총제영학당’이라고도 불렀다. 15세 이상과 20세 이하의 생도 38명과 수병 300여 명을 모집해 정식 개교한 후 먼저 영어교육을 받게 했다.군사교관으로는 영국 정부로부터 콜웰 대위
1883년 제물포 개항 이후, 인천을 출입하는 외국기선이 증대함에 따라 대외무역이 확대되고, 개항장을 중심으로 하는 유통권이 새롭게 형성되었다. 그러나 자본 발달이 미약한 조선으로서는 초기 해운업을 정부 직영의 형태로 추진할 수 밖에 없었다.1885년 전운국(轉運局)을 설치하고, 이듬해 해룡호(海龍號)·조양호(朝陽號)·광제호(廣濟號) 등의 기선을 구입하여 주로 세곡(稅穀) 운송을 전담했다.근대 해운업이라면 타인화물을 운송하는 ‘타인 운송’의 단계로 발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이에 따라 1893년 1월 민영준(閔泳駿), 정병하(鄭秉夏
개항 후 인천은 국내 최대의 미곡 집산지이면서 수출항으로 부상했다.근대식 정미소가 생겨나기 이전 초기 수출단계에서는 벼를 가마채로 배에 실어 보냈으나 부피가 크고 무게가 무거워 경제적이지 못했다.그래서 벼의 겉겨를 벗겨 현미 상태로 수출하는 매갈잇간이 생겨났고, 백미도정이 가능한 정미소가 생겨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인천 최초의 기계식 정미소는 1889년 일본인 신토오(進藤鹿之助)가 중앙동 4가에 연 인천정미소였지만, 설비와 품질에 있어서는 타운센드 상회에서 운영하던 타운센드 정미소가 한국 최초의 근대식 정미소라 할 수 있다.18
조선 정부는 당오전(當五錢)의 폐단이나 중량이 무거웠던 상평통보를 대신한 신식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1888년 2월 선혜청 별청 자리에 경성전환국을 두고 신식화폐를 발행했다. 그러나 거의 유통되지 못하였고 시험적 단계에 그치고 말았다.1891년 11월 전환국으로 하여금 1888년에 주조하다 중지한 바 있는 은화·동화 등 근대화폐를 다시 주조하게 하고, 교환국을 따로 설치하여 새로 주조될 근대화폐와 상평통보·당오전과 구애됨이 없이 통용케 하는 절목을 작성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또, 일본의 자본 및 기술적 협조를 얻어 전환국을 서울에서
오늘날의 기상관측은 단순히 일기예보만을 의미하지 않고 지진, 화산, 천문관측, 우주기상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국민의 생활을 지켜주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전근대에는 측우기와 수표 등과 같은 전통과학기술이 있었지만, 국가적 차원에서의 활용만 있었을 뿐 일반 민중에게까지 이론적으로 확대되지 못했다.근대 개항 후,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기상관측을 위해 1904년 4월 6일 제물포에 일본중앙기상대 제3임시관측소를 설치했다. 제물포 제3임시관측소는 현 중구청 뒤쪽 송학동에서 관측업무를 시작하여 1905년 1월 1일 응봉산 정상에 신축 청사가
1890년 9월 29일, 영국해군 군종사제였던 코프(Corfe,C.J.) 주교가 랜디스 (Landis, E.B.) 등 선교사 6명과 함께 제물포에 도착하여 조선에서의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 해 10월 성공회 의료 선교사 랜디스는 성당 밑에 집을 구해 임시 진료소로 사용하며 의료구호 활동을 펼쳤다.1891년 10월 16일, 랜디스는 지금의 내동 성공회교회 자리에 인천 최초의 서양병원인 성 누가 병원(St. Luke's Hospital)을 설립하였다. 그날이 성누가를 기념하는 침례일이었기에 병원 이름을 성 누가 병원이라 하였
1883년 인천 제물포가 개항되고 그 이듬해 각국공동조계가 설정되면서 1888년 응봉산(鷹峰山) 일대에 러시아 측량기사 사바찐의 설계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Public Garden’이 조성됐다.각국공원, 만국공원이라 불리던 이곳은 일제강점기 현 인천여상자리에 있었던 일본인 공원인 동공원과 대비해 서공원이라 불렸으며, 광복이 되면서 다시 만국공원으로 불리다가 6․25전쟁을 겪고 난 1957년 개천절을 맞아 맥아더 장군 동상의 제막식을 가지면서 자유공원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각국공원에 남아 있는 다양한
인천은 가까운 거리에서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지리적 이점으로 예전부터 수도권 시민들이 자주 찾는 관광지가 많다.그 중 하나가 월미도인데 지금도 주말이면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1920년대 월미도는 우리나라 최초이자 유일의 해수탕이 있어 ‘인천은 몰라도 월미도는 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꽤나 유명한 관광지였다.조탕(潮湯)이라 불리는 해수탕은 일반적인 바닷물이 아니라, 지하 암반층에서 바닷물과 성분이 비슷한 지하수를 끌어올려 이를 끓여 목욕물로 사용했는데, 이 암반수에는 각종 미네랄과 염화나트륨 등이 포함돼
서해안 섬들의 정신적인 공간, 원도 제사의 범위나 영향력이 마을에 한정되지 않고 국가와 지방관, 주민들이 모두 참여하는 제사가 인천지역에 있었다. 그것이 바로 낙섬의 원도사(猿島祠)에서 지냈던 제사다. 낙섬은 조선시대에 원도 (猿島)라 불리며 서해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섬의 위치가 서쪽 방위에 해당하는 신(申)의 방향이라 원숭이를 뜻하는 원도(猿島)로 불려진 낙섬은 일부 학자들의 해석처럼 육지에서 떨어져 있어서라기보다는 ‘납(納)섬’, 곧 ‘제사를 드리는 섬’에서 유래했다가 발음이 바뀌었을 것으로 추측된
한국 최초 감리교 예배와 인천 1884년 여름, 조선을 방문한 맥클레이(Mcclay,R.S.)는 고종으로부터 선교 윤허를 받았다. 당시 맥클레이는 일본에 체류 당시 친분을 맺었던 김옥균(金玉均), 미국 초대 주한미국공사 푸트(Foote,L.H.)와 동반하여 고종에게 선교의 뜻을 전하였다. 고종은 병원과 학교를 먼저 개설하고 점차 선교할 것을 권하였다.한편, 1884년 12월 4일 발발한 갑신정변(甲申政變)에서 왕실의 외척 민영익(閔泳翊)이 개화당의 습격으로 치명상을 입었다. 이때 선교사 알렌(Allen,H.N)이 그를
우리나라 서구식 호텔의 시작, 인천 1902년 서울에 세워진 정동의 손탁호텔(Sontag Hotel)이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인천에 세워진 대불호텔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었다.인천 개항 후 제물포를 방문한 외국인들은 서울까지 가는 교통이 불편하여 인천에서 하루를 묵어야만 했고 이를 위한 숙박시설이 필요했다. 대불호텔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문을 열었다. 처음 일본식 2층 목조 건물에서 문을 열었던 대불호텔의 모습은 ‘하퍼즈 위클리’라는 외국 잡지에 상세하게 그림으로 소개되어 있